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리프크네히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[[독일 사회민주당]] 창당의 주역이었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아들로 1871년 [[라이프치히]]에서 출생했다. 이후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한다. 아버지가 아버지였던 만큼 그 역시 열렬한 [[마르크스주의|마르크스주의자]]였고 사민당에 가입하여 각종 사회 운동을 하는 한편 좌익 활동가들의 변호를 담당하였다. 당시 독일 내에서 완연하였던 [[군국주의]]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총파업과 민중궐기를 통해 군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일의 민주화를 쟁취할 것을 촉구하였으며, 위와 같은 내용의 칼럼을 작성하였다가 필화를 당해 1907년 징역 18개월을 선고받는다. 사민당 내에서도 [[극좌]]로 분류되었던 그는 1914년 [[사라예보 사건]] 이후 [[제1차 세계 대전]]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/외교적 위기 과정에서 단호하게 반전을 주장하였다. 하지만 그의 입장과는 달리 [[카를 카우츠키]]가 주도하는 사민당 지도부가 [[민족주의]]에 사로잡혀 독일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것을 당론으로 정하고 만다. 결국 1914년 12월 당의 지침을 어기고 전쟁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지면서 당에서 축출당했다. 한편 이 무렵부터 리프크네히트는 자신과 의견을 함께하는 당내 반전세력들과 하나의 정치적 단체를 결성하는데,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[[스파르타쿠스 연맹]]. 대표적인 인물은 [[로자 룩셈부르크]], 그 외에도 클라라 체트킨, 프란츠 메어링 등이 있었다. 당연히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창설과 거의 동시에 불법단체로 찍혀버렸고 격노한 [[높으신 분들]]은 [[면책 특권]] 따위는 상큼히 씹어주시고 리프크네히트를 체포하여 강제로 [[동부전선]]으로 보내버린다. 반전주의자였으니 당연히 집총을 거부했고, 그래서 시체 매장이나 부상병 치료같은 일을 맡았다고 한다. 1916년 5월 석방되자마자 리프크네히트는 다시 스파르타구스단 활동을 재개했고 당연히 또 체포됐다. 반역 혐의로 4년형이 선고되었으나 1918년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면서 그 역시 석방된다. [[독일 혁명]]을 맞이하여 1918년 11월 9일 [[베를린]]에서 독일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(Freie Sozialistische Republik)의 수립을 선언한다. 문제는 같은 날 같은 베를린에서 [[필리프 샤이데만]]과 [[독일 사회민주당|사민당]]이 [[바이마르 공화국]]을 선언했다는 것이다. 시간상으로는 리프크네히트의 선언이 한 두 시간 정도 빨랐다.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기반으로 1918년 12월 31일 [[독일 공산당]](KDP)이 창당됐고, 공산당 창당 직후인 1월 4일 [[스파르타쿠스 봉기]]가 발발한다. 리프크네히트 본인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서 봉기를 반대했지만 강경파들이 밀어붙였고 리프크네히트 역시 울며 겨자먹기로 참여한다. 봉기는 2주 가량 지속됐지만 독일 정규군과 [[자유군단]]까지 동원한 [[프리드리히 에베르트]]에게 결국 진압당했고, 1월 15일 리프크네히트는 동지였던 룩셈부르크와 함께 자유군단에게 체포당했으며 직후 총살된다. 그 당시 자유군단은 '리프크네히트가 탈출하려다가 총에 맞았다.'라고 공표했지만, 오늘날에는 자유군단이 리프크네히트를 처형한 것으로 보고 있다. 사망 이후 수습된 그의 시체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[[베를린]]의 프리드리히스펠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. 이후 [[동독]] 정부가 이 공간을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동독 정치인들에 대한 추모공간으로 꾸며 놓았고, 현재까지도 이 공간은 사회주의자 묘역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